겉으로만 SF팬이라 해놓고 실제로는 SF라고는 일본 애니메이션 정도만 접했던 내가 아시모프와 클라크를 쪼금 읽다가 테드 창도 보게되었다.
테드 창의 단편에 열광하던 중(테드 창의 작품 리뷰는 차후에) 발견하게된 그렉 이건의 작품을 읽게 되었는데...
본격적인 "하드"SF소설로 분류되는 작품인 만큼 매우 어려운 내용이었으나, 다행이 양자역학에 일말의 지식은 있었기에 어느정도는 이해하며 읽을 수 있었다. 하지만 양자역학에 관한 배경지식이 없다면 이해하기 어려우니 "양자나라의 앨리스" 정도는 읽고 "쿼런틴"을 읽기를 추천한다.
쿼런틴은 양자역학에 대한 지식이 조금 있다면 매우 흥미진진하며 재미있고 참신한 내용이다.
추리소설과 비슷한 구조에 과학적 상상력을 매우 극대화시켜 "정말로" 재미있는 내용인데, 전체 내용과 양자역학의 이야기는 다른 블로그에서 매우 친절하게 설명해주셨으니 건너뛰자 ㅎㅎㅎ (노스님의 쿼런틴 리뷰 : http://blog.naver.com/trahaz?Redirect=Log&logNo=20061533554)
쿼런틴에서 내게 매우 의미심장했던 내용은 "충성모드"에 관한 것이었다.
주인공인 닉은 전직경찰이었던 탐정으로서 의뢰를 수행하던 도중 붙잡혀 충성모드를 강제로 이식당하게된다.
"앙상블"이라는 조직에 대한 무조건적인 충성을 하도록 의식을 강제하는 신경모드인데, 이 모드에대한 작가의 해석이 상당히 참신하다고 생각한다.
해부학적인 이식에 의해 가지게된 "충성심"이 과연 자기 정체성의 일부가 될 수 있냐는 질문에 주인공은 당연히 "그렇다"라고 답한다.
보통은 이런 상황에서 "모든 자유를 보장받아야 한다!!" 라던지 "타의에 의한 내 정체성의 수정은 있을 수 없다!!"라던지 하는 휴머니즘(?)의 입장을 취하기 마련인데, 주인공은 "타의에 의해 생긴 충성심이나 자의에 의해 생긴 충성심이나 같다!!" 라고 말하고 있다.
왜냐하면 진정하게 "자의에 의한" 정체성이라는 것은 실제로는 없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자신은 독자적이고 타의에 독립적인 정체성을 가진 "실존"하는 개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실제로 우리의 삶은 어떤가, 유전적 형질에 의해, 성장과정의 경험에 의해, 현재 처한 상황에 의해 자신의 정체성이라는 것은 끊임없이 수정"당하고" 있다.
다른 사람과 상호작용하고 세계 안에서 살면서 외부의 개입 없이 순수하게 독자적인 변화를 할 수는 없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수많은 외부자극에 의해 변화해온 나 자신이 그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렇다면 자신이 선택 불가능한 자극이 더 실존적일까, 그 반대가 그럴까?
주인공 닉은 오히려 자신의 정체성을 변화시키는 "신경모드"를 사용하는 것이야말로 무분별한 외부 자극에 영향받는 것보다 더 실존적이라고 말한다.
SF라는 도구를 이용해서 실존적인 문제에 대한 고찰을 하는 작가의 능력이 참 대단하다.
두번째로 생각을 하게 만드는 문제는 확산과 수축에 관한 본 작품의 주제와 관련있는 의문이었다.
쿼런틴에서는 확산과 수축을 통해 가능성이 있는 수많은(정말 수 많은) 평행우주 사이에서 "선택적으로" 수축하여 기적을 행하는 장면이 나온다.
평행우주 설은 양자역학에서 모든 것이 확률로서만 의미있다는 결과를 해석하기 위한 설로서,
슈뢰딩거의 고양이가 죽었을지 살았을지를 확인하기 전에는 두가지 버전의 우주가 각기 존재한다는 설이다.
하지만 이 평행우주설은 실제 현대과학에서는 정설이 아닌 것으로 판정되었다고 하던데 이유는 '오캄의 면도날'로 잘 알려진 방법에 의해서이다.
오캄의 면도날에 대해 정확하게는 서술하기 힘들지만 내가 아는 한으로는 어떤 목표로 가는 여러가지 길이 있다면 가장 가깝고 단순한 길만이 진실이고 나머지는 거짓이라는 판단법이다.
SF에서 자주 등장하는 (심지어 드래곤볼과 터미네이터에서도 나온다.. ) 평행우주는 일련의 사건의 결과에 따라 미래가 분기되는 형식의 개념인데,
드래곤볼의 예를 들면 트랭크스가 과거로 와서 미래를 바꾼다면 그 미래와 트랭크스가 출발한 미래는 다른 우주로 분기된다는 식이다.
실제 양자역학에서의 평행우주는 그것과는 스케일이 다르다.
세계를 이루는 모든 입자의 상태변화에 따른 다른 버전의 평행우주가 존재해야하는 것이다.
좁쌀하나를 이루는 입자의 개수를 수치로 표현한다고 해도 인간이 상상하기에는 너무나 많은 자리수가 필요한데,
전 우주를 이루고 있는 모든 입자의 개수의 제곱근만큼의 우주가 실시간으로 분기되며 새로 생성되고 있다고 상상해보라..
쿼런틴에서는 "실제로 그러하다"라고 가정한다.
하지만 인간이 가진 관찰자로서의 능력때문에 우주는 실제로 그렇게 많은 버전이 존재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 부분에서 약간 비현실적인 작가의 도약이 약간 부자연스럽다.
양자역학에서 관찰자의 존재가 결정적으로 중요하기는 하지만 그 관찰자의 핵심을 뇌의 신경활동에 있다고 가정한 것이다.
이 부분은 주인공도 매우 혼란스러워 하는 부분인데, 입자로 이루어진 뇌의 신경활동이 다른 입자들의 (셀 수도 없을 만큼의 입자들의) 상태를 결정하는 관찰자가 된다는 사실에서 너무나 큰 비약이 있지 않았나 생각된다.
물론 이러한 비약이 작품을 참신하고 흥미롭게 만드는 핵심이 된다. ㅎㅎ
결국 픽션은 픽션일 뿐이라는 것인데,
조금 더 상상력을 발휘하면 더 재미있는 (하지만 더 하드한) 픽션이 나올 수도 있을 것 같다.
에르빈 슈뢰딩거(슈뢰딩거의 고양이 사고실험을 제안한 바로 그분!)이 쓴 "생명이란 무엇인가"의 시작 부분에서는
우리 인류, 나아가 지구상의 생물종이 왜 이 사이즈, 거시적인 물리법칙이 적용되는 이 사이즈로 진화했는지에 대해 고찰한다.
그 이유는 양자단위의 미시적인 불확정성에 구애받지 않고 통계적인 결과에 기반하는 거시적인 물리세계에서여야만 생명으로서 존재할 수 있는 지구상의 생명단위 때문이다.
예를 들어 미시적인 단위의 사이즈에서 생명이 살아간다면 눈에 보이는 빨간색은 지금은 빨간색이지만 어쩔 때는 파란색이 될 수도 있는 것이고,
지금은 내가 이곳에 있지만 어쩔 때는 저곳에 있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즉 쿼런틴에서 말하는 확산과 수축의 반복을 실제적으로 경험할 수 있는, 기적이 일상화된 상황이 되어버린다.
이러한 상황에서 생명은 존재 자체를 유지하고 주변의 환경에 적절히 대처하기가 힘들다. 아니 불가능하다.
그래서 다행이도 양자단위의 미시세계가 아닌 통계적으로 확정적인 거시세계에서 생명체는 진화할 수 있었다.
기적이 없는 "예측 가능한 세계"에서 살아가도록 진화한 것이다.
결국 쿼런틴의 확산과 수축의 개념은 슈뢰딩거가 지적한 생명의 근본과는 맞지 않는 이야기가 되어버린다.
실제로 쿼런틴에서와 같이 확산과 수축을 자유자재로 통제하려면 (현대물리학이 아직 풀지 못한 관찰자의 문제이지만) 뭔가 다른 이야기가 전개되어야 한다.
인간의 뇌가 가진 신경배선 단위의 거시적인 원인이 아니라, 좀 더 미시적인 원인에 의해 확산과 수축을 통제할 수 있어야 대충 맞는 이야기가 되지 않을까.
물론 그런 이야기는 쿼런틴보다 더 하드한 이야기이고, 재미없는 이야기가 될 가능성이 더 크지만 ㅎ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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